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야 문명 (문단 편집) == 전쟁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1-maias.webp|width=35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f224ee3-3fcf-4841-b077-fc2f7c8b4654.png|width=19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cfc8397816c8236741f46738047260f.jpg|width=195]]}}}||<:>{{{#!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yan-warrior-paul-sandilands.jpg|width=195]]}}}|| |||||||| [[보남팍]]의 전쟁 벽화와 마야 전사들의 복원 추정도 |||||||| 마야 사회는 언제나 전쟁을 벌일 태세가 되어 있는 사회였다. 전쟁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고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웠다. 마야 문명의 수많은 도시국가들끼리 농토와 물, 자원과 노예 따위를 두고 쉬지 않고 싸워댔던 것이다. 선고전기 이래 대도시들이 등장하면서 전쟁은 더욱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과 전투는 도시간 전면전이라기보다는 국지전에 더 가까웠으며, 전쟁의 목적도 적국을 멸망시킨다는 것보다 포로를 잡아오고 재산을 빼앗아오는 것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에 패배하면 제물로 바쳐져 죽는 사람들은 대부분 엘리트층과 귀족들, 전사들이었고 평민과 농부들은 전쟁의 승패여부와 상관없이 제 할일에 게속 종사했다.[* 대부분의 마야 평민들에게 전쟁에서 자국의 왕이 지고 다른 국가에 편입된다고 해도 그저 세금을 내는 대상이 바뀌는 차이 뿐이었다. 사실 도시 인구의 대다수는 전쟁에 활발히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전투에서 죽는 졸병들은 평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마야의 왕과 귀족들은 전쟁이 터지면 최전선으로 나가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전쟁에 나가지 않는 자는 겁쟁이로 취급받아 경멸받았고 반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왕은 곧 위대한 통치자로 대접받았다. 왕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기면 물론 최고의 대우를 받고 전리품도 가장 좋은 걸 가져갔지만 패배하면 왕권 자체가 흔들렸다. 패배한다면 최선이래봤자 타국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 타국에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었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부계 상속을 통해 군 직위를 그대로 물려주었는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는 경우도 많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면 왕과 함께 적국으로 끌려가 온갖 험한 꼴을 당하다 그대로 신에게 바쳐졌다. 마야 문명의 도시들은 대부분 상비군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숙련된 전사 계급과 [[용병]]이 존재해 전쟁에서 장교를 맡거나 선봉에 서긴 했지만 이들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강제로 징발된 평민 농부들이었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이 거의 대부분 농부였던 탓에 거의 모든 전투들은 수확기 전에 치러졌다. 양국 모두 전쟁이 끝나면 어쨌든 수확을 하긴 해야하니 수확을 하기 전에 미리미리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병사들은 당연히 남자였다. 일부 전설에는 전사 여왕이 군대를 이끌었다거나 여자들이 함께 참전해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고고학자들이 병사들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청년, 중년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마야인들의 전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마야 도시들의 평균 간격은 약 55km 정도로 약 2~8일 정도 행군해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꽤 거리가 되는 장거리였다. 병사들이 물자와 무기 등을 지고 험난한 정글을 뚫고 먼 거리를 행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대군을 동원하는 게 힘들었다. 대다수의 전투는 양측이 약 500~1000여 명 정도의 규모에 그쳤으며 참전규모가 천 명 단위가 넘어가는 전투는 정말 국운을 건 전면전 정도가 아니라면 거의 없었다. 전투 방법은 일단 전사들이 저멀리서 투창 '아틀라틀'을 던져 적진을 교란시킨 다음, 전속력으로 달려가 근거리에서 칼과 창 등으로 적군의 전열을 깨부수고 전사들을 학살하는 방식이었다. [[화약]]의 존재를 몰랐기에 [[총]]이나 [[대포]] 같은 화약 병기들은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 고전기 초기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지방에서 투창 '아틀라틀'이 마야 문명권으로 유입된다. 아틀라틀은 대략 0.5m 길이의 짧막한 투창인데 끝에 [[흑요석]]이나 처트로 날카롭게 만든 창날이 달려있어 던지기에 유용했다. 팔근육의 힘으로만 무기를 던진다면 지나치게 사거리가 짧았기에 스틱이나 돌팔매를 사용해 던지기도 했다. [[활]]과 [[화살]]처럼 아시아-유럽권의 전통적인 장거리 무기들도 존재는 했지만 선호도가 높지는 않았으며 후고전기 들어서야 전장의 주요 무기로 쓰였다. 근접전을 벌일 때에는 나무에 흑요석 조각들을 박아넣어 만든 양손검을 썼다. 간혹 피해를 더 입히기 위해 오물이나 독을 바르는 경우도 있었다. 면을 소금물에 담궈 단단하게 만든 형태의 갑옷을 입기도 했고,[* 이 갑옷은 의외로 효율이 매우 좋았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사용하던 강철 갑옷보다도 더 쓸모가 있었다. 덥고 습하고 푹푹 찌는 날씨의 우림에서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쉽게 녹슬 뿐만 아니라 굉장히 무거웠다. 하지만 면 갑옷은 경도도 강철 갑옷에 만만치 않게 강했을 뿐 아니라 더 가볍고 통풍도 잘되었기 때문.] 전사들은 깃털과 동물 가죽으로 덮어씌운 독특한 형태의 방패를 들고 다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